본문 바로가기

옛 기사

영화에서 만난 ‘차이코프스키 선율’

김상현 기자의 클래식 산책 | 「NEWS+」1997년 7월 10일자(No.91) 

    사회의 인습과 규범을 거부하고 사랑에 몸을 던진 여인. 그러나 그 사랑으로 인해 파멸의 운명을 맞는 여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올해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피 마르소와 숀 빈이 각 각 안나와 브론스키를 연기했으며, 베토벤 영화 「불멸의 연인」으로 친숙한 버나드 로즈(감 독)와 게오르그 솔티경(음악감독)이 다시 손을 잡았다. 그 때문인지 「안나 카레니나」의 장 면 위로 자꾸만 「불멸의 연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돋보인 불멸의 연인. 그러나 베토벤스러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다. 월광 소나타를 치는 대목이 압권.

    그러한 겹침은 주로 음악 때문인데, 두 영화는 무엇보다 한 작품을 일관된 주제 선율로 삼 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불멸의 연인」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2악장이, 「안나 카 레니나」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그런 구실을 한다.

    영화와 음악의 어울림만을 따진다면 「안나 카레니나」 쪽이 더 무난하다.

    이 영화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당당하다. 그것은 영화 장면의 한 보조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종종 그와 동격에 놓인다. 발레공연 때 브론스키가 안나를 지켜보는 장면에서 울려퍼 지는 「백조의 호수」나, 안나가 환각상태에서 괴로워할 때 들려오는 「예브게니 오네긴」 중 편지 장면은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두고두고 기억될 부분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안나 의 운명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제6번 교향곡 「비창」이다. 비창의 각 악장은 2~4분씩 분절되어 영화 곳곳에서 흘러 나오는데 안나의 사랑과 고통, 비애와 절망감 을 그처럼 잘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제1악장의 느린 템포와 서주는 영화 첫머리에 등장한다. 콘트라베이스의 낮은 중음과 신음 하듯 끼어드는 파곳의 막막한 선율이 마치 영화의 비극적 종말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린다.
 

  비창의 아름다운 2악장 「알레그로 콘 그라치아」가 안나와 브론스키의 행복한 이탈리아 시 절을 더욱 빛내주며 절망과 체념의 색조, 죽음을 예감한 자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음률 의 4악장이 안나의 참담한 끝과 함께 한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다. 그것은 대부분, 「너무나 평범한」 솔티경의 음악 배치에서 비롯 된다. 그는 「이 장면에는 이런 음악이 나오겠지」 하는 일반인의 상상에서 조금도 일탈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난하기는 하지만 신선한 충격이나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맨 끝장면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넣은 것도 썩 좋은 생각은 아닌 듯 하다.

    바이올린의 카덴차에 이어 강렬하게 터져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총주는 화려하지만 고 작 35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곧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 독주는, 영화 전체를 마무리하기 에는 다소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보기 드문 예술영화」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란한 특수효과의 블록버스터들에 밀려 개봉날짜가 8월로 연기되고 말았지만 그것 또한 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김 상 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