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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면...

약간 과장하면 자정이 다 될 무렵까지 훤한 여름이나 그 양 옆의 봄, 혹은 가을 비슷한 계절을 제외한다면, 이 말 '어둠이 내리면...' 뒤에 '나는 집에 간다'를 쓸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게 복임을 종종 인식한다. 이민 오기 전의 상황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다음 둘 중 하나가 되겠다.

어둠이 내리면...그래도 사무실에서 일한다. 혹은 일하는 척한다. 또는,
어둠이 내리면...술 마시러 간다. 원하지 않든, (드물게) 원하든.

각설하고, 제임스 그리판도 (
James Grippando)의 스릴러 '어둠이 내리면' (When darkness falls)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존 킨들 판으로 3부에 걸쳐 공짜로 나왔는데, 2부를 읽을 무렵부터 재미있으니까 보라고 아내를 채근했다. 어제 저녁 막 책을 읽기 시작하더니 이내 삼매경이다.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이 소설의 '어둠이 내리면'은 위에 내가 제시한 예문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슬픈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의 '어둠'은 주인공 빈센트 파올로의 신체적 상황을 가리킨다. 소설에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한 범죄 상황에서 불의의 오판으로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파올로의 주임무는 인질극이나 자살극을 벌이는 범인과 평화롭게 타결짓기 위해 협상하는 것. 협상자, 혹은 네고시에이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추리소설 광들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무지하게 그리판도를 몰랐더란 말이냐고 눈으로 화등잔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이 소설이, 여기에서도 주인공중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잭 스와이텍의 여러 시리즈물중 하나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스와이텍은 전직 플로리다 주지사를 아버지로 둔 명문가 출신의 변호사다. 바를 운영하는 조력자 테오 나이트는 무고하게 범인으로 몰려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스와이텍의 변호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그와 둘도 없는 친구 겸 동업자가 됐다. 

소설은 빈센트 파올로가 다리 위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홈리스 '팰콘'과 협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팰콘의 요구 사항은 마이애미 시장의 아리따운 - 당연히 아리따워야 소설이 되지 않겠나 - 딸 알리샤와 얘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게다가 알리샤는 파올로와 사랑하는 사이래요. 알리샤도 경찰이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 국한한 다면 경찰스러운 점은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찰은 그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겠다며 내려오게 해서는 그를 현장에서 체포해 버린다. 협상할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파올로의 이의 제기는 경찰의 계급 구조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독자는 누구나, 이게 나중에 부메랑이 되겠구나, 직감하게 된다.

구속된 팰콘은 홈리스 신분임에도 거액의 보석금을 손쉽게 지불하고 다시 풀려난다. 공교롭게도 그의 변호사가 스와이텍이다. 알리샤의 아버지는 그가 다시 자기 딸을 스토킹 할까봐 노심초사하고, 팰콘이 주거지로 삼는 낡은 차의 트렁크 안에서 처참하게 맞아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에 쫓기게 된 팰콘은 스와이텍과 테오가 탄 차에서 돈을 내놓으라며 승강이를 벌이다 한 여관을 들이받는다. 스와이텍은 어찌어찌 탈출하지만 테오는 들이받힌 여관에 들었던 사람들과 함께 팰콘의 인질이 된다. 소설의 3분의 2는 팰콘과 파올로/스와이텍이 벌이는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는 협상 내용, 그에 얽힌 다양한 복선과 과거사가 차지한다. 

바하마의 은행에 예치된 그의 돈을 비롯해,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드러난 예사롭지 않은 사격 솜씨 등으로 팰콘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그와 알리샤의 관계, 더 나아가 그 아버지와의 이력이 막판의 충격으로 준비된다. 아르헨티나에서 1980년대에 자행된 이른바 '더러운 전쟁'의 처참하고 잔인한 한 실상이 소설의 모티브로 등장하면서, 나로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또한 편의 추악한 인간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다.

소설은 실로 흥미진진했다. 젊고 건강하고 능력 있는 형사가 실명하면서 그의 주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은 더없이 생생했고, 설득력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 대한 묘사와 그 파장을 소설의 전체 줄거리 안에 녹여넣는 시도도 매우 성공적으로 보였다. 곳곳에서 재치 있는 표현들이 읽는 재미를 더했고, 주요 등장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가 소설의 전체적인 사실성을 한껏 높였다. 이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라는 사실을 소설의 도입부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별 다섯에 다섯. 소설의 감동이나 깊이로 친다면 넷에 그치겠지만, 헤이, 이 책 공짜로 구했거든? 당근 별 다섯 다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