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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침묵의 감동

'침묵이 금'이라는 말의 적실성은, 거의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다. 말 실수로 크고 작은 봉변을 치르거나 스스로 부끄러운 경험을 자꾸 되풀이하면서, '침묵'이 어떤 때늦은 변명이나 해명보다 더 유용하고 유효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의 소리라? 침묵의 아름다움, 그것도 더할 수 없는 [極] 아름다움이라고? 

나는 그 한 사례를 클래식 음악에서 가끔 확인한다. 오늘도 그런 순간을 잠깐 확인하는 행운을 누렸다. 사이먼 래틀 경과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4번. 

크리스틴 쉐퍼 (Christine Schäfer, 소프라노)가 4악장 천국의 삶을 아름답게, 조금 과장하면 '천상스럽게' 노래하고, 교향곡은 말러스럽지 않게, 조용히, 마치 잠들듯 마무리된다. 래틀 경은 마지막 여운을 유지하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두 손을 들고 그 자세로 가만히 있다. 관객도 숨을 죽이고, 기침을 참고, 부스럭거림도 멈추고, 그 침묵의 여운에 동참한다. 바로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그 침묵의 한 편은 방금 마무리된 아름다운 노래의 여운으로 노을처럼 물들면서 서서히 무한의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말러 4번 연주의 끝. 그 직후의 여운. 침묵의 소리.


지휘자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하나둘 빠지듯 박수가 시작된다. 그리곤 브라보, 하는 고함 소리, 박수는 우레처럼 커진다. 

나는 이런 연주회가 참 좋다. 이렇게 조용히, 스며들듯, 사그라지듯 끝나는 곡이 아닌 경우에도, 심지어 말러 1번이나 2번처럼 벽력 같은 소리로 폭발하며 끝나는 경우에도, 제발 관객들이 4, 5초 정도는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제발,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나설 새라 마지막 '짠!'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번개같이 "브라보!" 소리를 질러대는 저 자발 없고 천박하고 눈치 없는 '짠브라보 족(族)'은 그냥 집에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연주나 공연이 아니고, 다만 다른 이(들)의 연주를 보러 온 관객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하거늘, 그런 자리에서조차, 나 저 곡 잘 알거든, 하고 과시하듯, '짠브라보'로 일관하는 그 분들은, 제발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어 주셨으면 좋겠다. 

얼마전 한 보도를 통해,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가진 말러 9번 연주회에서, 휘날레 뒤에 무려 2분30초 동안이나 - 또 이 시간은 누가 쟀냐? 참 대단하다... - 손을 든 채 서서 관객의 침묵을 유도했다고 한다. 그 침묵은 얼마나 특별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겠다. 지극히 아름다웠을 수도 있고, 숨 막힐 듯 견디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음의 한 정화를 만나는 체험을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한 가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연주회로 기억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아마 그 순간의 침묵은 오케스트라의 총주보다도 더 큰 굉음을 내지 않았을지...!

아바도가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침묵을 듣다' (Hearing the Silence)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그 순간보다, 음악 사이의 침묵, 특히 장려한 휘날레 뒤의 그 여운, 소리 없음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내가 아바도의 그 말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음악 속의 침묵이 어떤 의미와 아름다움을 갖는지 진정으로 안다고 강변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나는 다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특히 음악을 다 듣고 난 직후에, 정말 잠시라도 그 여운을, 그 감동을, 가슴과 머리 속에 차분히 담는 - 또는 담으려 시도하는 - 여유를 갖자는 것이다. 설령 내가 내 가슴 속에 재대로 담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다른 관객이 그런 기회를 갖도록 틈이라도 주자는 것이다. 제발. ... 

아래 유튜브 비디오는 말러 4번의 리허설 장면. 왜 많은 이들이 말러 음악을 요란하고 시끄럽다고만 생각하는지 때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안타깝기조차 하다. 말러의 선율미야말로 정말 눈물겨울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