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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결핍이 주는 힘

근래 인상적으로 본 영화 가운데 '용의자 X의 헌신' (네이버 영화정보)이라는 게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시계에서 해방되면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곤 하지..." 

그 말이 유독 가슴에 남았다. 무엇엔가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더 독립적이 된다는 뜻일까? 무엇인가 결핍되었다는 것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는 뜻? 아니면, 없으면 찾게 되고, 찾으면 이내 시들해지는 사람의 변덕스런 심리를 표현한 것일까? 

그 직접적인 연관성은 그만두고, 분명한 것은 이 말로부터, 에드먼튼으로 이주한 이후 지난 2년 동안 내가 보인 행동을 떠올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억지춘향 격으로 그 말의 진의를 잠시 고민해본 것이고... 

사진 출처: http://goo.gl/Lkem6

머릿속을 막 스쳐 지나가는 나의 몇 가지 과거 행적부터...

- 속리산국립공원은 내가 살던 시골집으로부터 차로 한 시간쯤이면 닿는 데 있다. 그런데 정작 그 산을 찾은 것은 채 다섯 번도 안된다. 게다가 첫 방문은 대학에 들어가서, 그러니까 시골집을 떠난 뒤에야 성사(!) 되었다.

- 토론토에는 캐나다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토론토 심포니가 있다. 그런데 명색이 클래식 팬이라면서도 토론토에 사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공연장을 찾은 적이 없다. 캐나다에서 가장 활발하고 수준 높다는 뮤지컬도 마찬가지. 차로 한 시간 반쯤이면 닿는, 수준높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한 스트래트포드 페스티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역시 차로 10시간 정도면 닿는 뉴욕 - 비행기론 더 금방 가겠지 - 에도 가본 적이 없다. 2001년 이민 온 직후, 억지 춘향으로 당일치기 투어버스를 타고 돈 게 전부. 뉴욕 뮤지컬, 뉴욕 필하모닉은 아예 거론도 하지 말자.

- 토론토의 도서관 시설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 특히 다운타운에 있는 참고자료 도서관 (Reference Library)은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세계적인' 장소이다. 거의 이용한 적이 없다. 심지어 다운타운에 살며 대학에 다닐 때도... 공립도서관 회원으로 가입하긴 했지만 - 그것도 공짜 - 역시 거의 이용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여기엔 핑계도 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책 하나 빌리려면 부지 하세월이다. 한두 달은 양반,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정보를 보면 에라 이...하고 말지...

에드먼튼으로 온 이후 새사람으로(만세!) 태어난 몇 가지 '모범적인' 행태

- 도서관을 꽤 열심히 이용한다. 에드먼튼에 살지 않아서 그곳 도서회원이 되려면 먼저 내가 사는 동네 (새알밭...아니 세인트앨버트)의 도서회원이 돼야 한다. 게다가 둘다 공짜가 아니다. 토론토는 공짜였다고 말했던가? 그러니 두 곳에 이중으로 돈을 내야 하는 셈. 둘을 합쳐도 채 5만원이 안되니까 큰 부담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짜와 견줄 수야 있으랴. 그래도 회원으로 가입해서 책도 빌려보고, CD도 빌려 듣고, 가끔 DVD까지 들고 와서 본다. 하, 대견하다 흘흘...

- 연주 수준이 그저그런, 이라고 하면 안되고, 제법 높은, 에드먼튼 심포니의 시즌 티켓을 샀다!!! 시즌 티켓이라고 해야 토요일 저녁에 하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여섯 번 가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시즌 티켓은 시즌 티켓이다. 문제는 애들을 맨 앞에 내세운 이런저런 핑계로 두 번인가밖에 못갔다는 점. 이제 시즌 티켓은 물 건너 갔다.

- 한국에 한 달간 들어간 지난해 12월, 서울시향 공연을 예약했다. 정명훈-시향의 말러 3번을 보기 위한 것. 정작 한국에 살았다면 그 정도로 정성과 관심을 기울였을까? ... 아니었을 것 같다.

- 2월 말에 밴쿠버 처가에 간다. 간 김에 공연이나 볼까? 밴쿠버 심포니의 연주회가 마침 딱 걸렸다. 핑커스 주커먼이 솔로이스트로 나오는 베토벤 프로그램. 그래, 보자. 예약 완료. 밴쿠버에 살았다면 이랬을까? 아마도 아닐듯...

- 가만, 4월 말에 캘거리에서 말러 2번 '부활'을 한다던데...? 이번엔 호텔까지 잡아가면서 예약. 에드먼튼 사람들의, 액면 그대로 믿기는 다소 주저되는 전언에 따르면, 캘거리 필하모닉의 연주 수준은 에드먼튼 심포니보다도 못하다는데, 과연 어떤 말러를 들려줄꼬? 어쨌든 한 번 가보세. 캘거리에 살았다면? 아마도 아니었을듯... 아니, 말러니까 혹시 갔을 수도 있겠다. 글쎄...?


이렇게 되나가나 적어놓고 보니, 딱 한 마디 말이 머릿속을 친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코앞에 세계에 자랑할, 세계에 내놔도 손색없는 - 실제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 문화 단체와 행사가 줄서 있는 데 살 때는 눈길도 안주다가, 걸핏하면 영하 2, 30도로 곤두박질 치는 동토 깡촌으로 와서 그런 문화에 목말라 하는 이 우스꽝스런 작태라니...! 사람이라는 게 이래서 어리석고 구제 불능이란 소리를 듣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