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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What's in a name?


What’s in a name?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름을 잘못 건사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비행기를 못 타는 일이 생긴다. 아니, 놓치는 일이 생긴다. 이곳 캐나다에서, 직장에서 내 이름은 케빈이다. 케빈 킴. 하지만 공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다. 공식 이름은 여전히 김상현이다. Sanghyun Kim. 운전면허증, 의료보험 카드, 여권 등 공식 문서의 이름은 다 상현 킴이다. 회사의 인사  데이터베이스에만 케빈 킴으로 돼 있다. 굳이 공식 개명을 하지 않아도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웹 체크인으로 표를 인쇄해 공항에 와서야,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회사 공무로 가는 출장의 비행기 표에 적힌 이름 (케빈 킴)이, 지갑에 넣어 휴대하는 운전면허증이나 의료보험 카드의 이름 (상현 킴)과 다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다 못해 ‘상현 (케빈) 킴’ 하는 식으로 케빈을 슬쩍 끼워넣기라도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에어캐나다 발권부에 가서 물어보니 이름을 공식 문서에 표기된 것에 맞춰 바꿔야 한다면서 100달러를 내라고 했다. 아니 이름 하나 수정하는데 무슨 100달러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으면 표를 새로 사야 하는데 그건 더 비싸지 않겠느냐고 아예 '싫으면 말고' 식의 위협조였다. 화는 났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 보여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가 문득 항공권 예매를 회사의 공식 대행사를 통해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쪽에 수정을 문의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100달러 내고 이름 바꾸는 일은 취소했다 (2년 전엔가도 비슷한 일을 공항에서 겪은 경험이 나는데, 그 때는 돈을 내라는 말이 없었다. 그새 이렇게 서비스 품질이 더 나빠졌다는 한 증거다). 


얼마 안 있어 이름을 제대로 바꿨노라는 대행사의 연락이 왔다. 에이전트는 따로 수수료 (내게 요구한 100달러)는 내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렵지 않게 해결됐구나 싶어 안도했다. 잠시 뒤, 나와 함께 출장을 가는 동료들이 도착했다 (나는 오전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반나절 일을 한 뒤 곧바로 공항에 나온 터였다). 


문제는 탑승 과정에서 발생했다. 내 이름이 없다는 거다. 케빈 킴은 있지만 체크인이 안 됐단다. 그럴 리가! 분명히 케빈 킴이라는 이름으로 웹 체크인을 해서 인쇄해 왔건만 에어캐나다의 데이터베이스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만석이고, 내 자리는 다른 사람이 체크인해 버린 마당이었다. 탑승 게이트 요원도 도무지 모를 일이라며 서비스 데스크로 가보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이름을 바꾸면서 케빈 킴으로 체크 인 된 정보는 무효 처리가 되었다. 새로 바꾼 이름 - 상현 킴 - 으로 다시 체크인을 했어야 하는데 막판까지 체크인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대기 상태에 있던 다른 사람이 체크인 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 내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돌아버릴 일이었다. 이름이 바뀌면 표도 새로 끊어야 한다는 서비스 데스크 요원의 훈계 아닌 훈계를 들으며 다음 비행기는 몇 시냐고 물었다. 7시40분인데 만석 상태여서 자리가 날지의 여부는 7시쯤에나 알 수 있단다. 여유 좌석이 확실한 비행편은 10시 이후인데, 예약을 하려면 따로 수수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이건 무슨 작은 일만 하면 수수료다. 7시까지 기다려 보고 좌석이 안 나오면 출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10시 넘어서까지 비행기를 타고 갈 마음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좌석 번호란에 ‘대기’ (standby)라는 뜻의 SBY가 적힌 표를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후 두 시쯤부터 공항에 있었으니 다음 비행편을 만날 때쯤이면 다섯 시간이 넘는다. 아이고….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항공편은, 아무튼 가능하면 이용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 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새삼 되새긴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남은 서너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데 프린스 조지로 가는 에어캐나다 승객 ‘쌔앵히운 킴’은 서비스 데스크로 오시라는 방송이 나온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싶으면서도 터덜터덜 가보니, 대기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위한 좌석 하나가 확정되었다는 희소식을 전한다. 먹구름 속의 햇빛 한 줄기쯤 - silverlining - 되는 건가? 참 살다 살다 벼라별 일을 다 겪는다. (맨 위에 올린 사진은 공항에서 내다본 지평선이고, 위 사진은 최근에 개축한 공항의 한 실내 풍경이다. 밴쿠버 공항에는 토템 폴처럼 애보리지널 문화를 드러내는 조형물이 유난히 많다.)


업데이트. 이제 밤 열 시. 프린스 조지에 무사히 내렸다. 택시로 호텔까지 와서, 씻고, 이제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7시30분, 밴쿠버에서 막 출발하려고 할 즈음, 갑자기 프린스 조지 공항에 짙은 안개가 낮게 깔려 어쩌면 비행기가 가도 내려앉지 못하고 밴쿠버로 회항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아시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런 수도 있을 수 있구나!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그런데 다행히,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과연 안개가 끼어 있었다. 택시 기사는, 8시30분 무렵까지도 달이 보였는데 불과 2, 30분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라고, 프린스 조지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쨌든 참 길고 긴 월요일이 간다. 하필이면 오늘의 이 월요일이 1년중 가장 우울한 월요일이란다. 뭐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공항 대기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탓에, 아니, '덕택에', 독서는 실컷 했다. 장강명의 소설 '그뭄,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을 다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참, 아내와 잠깐 통화하며 큭큭 웃은 얘기. 성준이와 통화하면서, 아빠가 없는 동안 네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 you must protect mommy, got it? - 했을 때 잠시 침묵이 흘렀었는데,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엄마에게 묻더란다. 아빠가 그런 말을 했는데 조크 아니냐고, 엄마가 아니라고 하니까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더란다. 엄마를 지키기엔 내가 아직 어린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