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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더 멋진 배우들

'늙어서도 멋진 배우', 라고 하면 말이 되지만 '늙어서 도리어 더 멋있어진 배우'라는 게 말이 되나? 나이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것은, 어느 나라의 문화를 들여다보든 ‘추하다’거나 ‘약하다’, ‘슬프다’와 같은 이미지와 대체로 동일시되는 마당 아닌가. 늙을수록 더 현명해진다거나,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캠페인은,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거나, 그런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다소 거칠게 말한다면, 단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로 케빈 코스트너를 보면서,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디즈니의 교훈성 다분한 스포츠 영화 ‘맥팔랜드, 미국’ (McFarland, USA, 2015년)를 보면서, ‘아, 늙어서, 늙어가면서, 도리어 젊은 시절보다 더 멋있어지는 배우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나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Rottentomatoes.com이 집계한 뭇 언론의 평가를 보면 긍정적인 쪽이 79%나 되는데, 거기에 요약된 글이 또 흥미롭다. 


Critics Consensus: Disney's inspirational sports drama formula might be old hat, but McFarland, USA proves it still works -- especially with a talented director and eminently likable star in the mix.


비평가들의 공통 의견: 감동을 주기 위한 디즈니의 드라마 공식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것이지만 ‘맥팔랜드, 미국’은 그런 공식이 여전히 먹힌다는 것을 - 특히 재능 있는 감독과 유달리 호감을 주는 스타를 묶으면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minently likeable’이란다. 꼭 케빈 코스트너뿐이 아니다. 그의 부인 역으로 나온 마리아 벨로 역시 더없이 수더분하다. 대단한 미인이지만 꾸미지 않은 모습이 참으로 배역의 이미지와 잘 맞고, 그래서 아름답다. 아내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우연히 마리아 벨로의 손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 손이 일반 주부 손이냐고 놀랐다. 그러니까 분장을 그렇게 해서가 아니라, 평소에 집에서도 여느 주부들처럼 손에 물 묻히고 평범하게 산다는 증거였다. 


넷플릭스를 통해 갖은 영화를 본다. 더더군다나 내가 사는 나라와 상관없이 어느 나라 것이든 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를 가외로 쓰는지라, 캐나다뿐 아니라 미국, 영국, 호주, 아일랜드 등 영어권은 물론 스웨덴, 벨기에, 덴마크, 멕시코, 심지어 최근 문을 연 일본 넷플릭스까지 기웃거린다. 아이러니는, 내 생전 요즘보다 더 많은 영화나 드라마 선택권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확 당기는,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는 놀랍도록 적다는 점이다. 영화가 좋은 줄은 비평이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고 있지만 그 순간의 정서나 심사와 맞지 않아 다음으로 - 때로는 기약없이 멀리 - 미루는 경우도 있고, 좋아 보이지만 ‘R’이나 ‘Adult’, ‘Mature’ 같은 등급 표시 때문에 망설이게 되는 경우, 소재는 매력적인데 별점이 너무 낮아서 멀리 하는 경우 등등. 


그런데 별점이나 영화 등급과 상관 없이, 어쨌든 잠깐 맛보기로라도 보자라고 결심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케빈 코스트너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그 중 하나다. ‘늑대와 춤을’ ‘워터월드’ 등으로 절정 달리던 그의 ‘미남 스타’, ‘액션 스타’의 이미지는 꽤 오랫동안, 영화 ‘Upside of Anger’ (2005)로 조용히 벗어날 때까지 슬럼프에 시달렸다. 이후 그는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 잔잔한 드라마들에 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내겐 그런 장르가 그와 훨씬 더 잘 맞는다고 여겨졌다. 


그와 비슷한 ‘맹목적 애정’을 느끼게 되는 - 그와 동시에 늙어서 더 멋있어 보이는 - 배우들로는 로버트 레드포드, 피어스 브로스넌, 리암 니슨, 모건 프리먼, 도니 옌 (견자단) 등이 있다. 한편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여전히 멋있고, 그래서 영화도 덩달아 찾아보게 되는 배우들로는 조지 클루니, 이완 맥그리거, 맷 데이먼, 브래드 피트 같은 이들이다. 브래드 피트는 근래 들어 그 진가를 새삼 알아보게 된 배우라고 할 만한데, 그 전까지는 그저 잘 생긴 배우로만 생각했다가, 그가 지닌 ‘조용한 카리스마’의 위력을 영화 ‘퓨리’ (Fury, 2014)에서 확인했다. 그는 카리스마를 대놓고 주장하기보다는 조용히, 그 존재 자체로 - 혹은 튀지 않으면서도 더없이 안정된 연기 자체로 - 자신의 존재감을, 영화 전체의 균형과 무게감을 온전히 잡아주는 좋은 배우다.


근래 넷플릭스와 DVD 등으로 본 영화들 중 특히 기억하고 싶은 몇몇 가작들은 이렇다. 물론 온전히 주관적인, 따라서 편견에 가득찬 나만의 애호 리스트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로버트 레드포드 - 선댄스영화제를 차려 영화계의 막강한 권력자가 된 그가, 대체 쪼글쪼글 주름살을 아낌없이 내비치며 영화에 출연할 이유가 뭘까 싶은데,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늙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자기 나이에 걸맞은 연기를, 더없이 차분하고 안정되게 펼친다. 멋지다. 


  • The Company You Keep (2012) - 레드포드의 농익은 연기,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도리어 더 인상 깊었던 연기가 펼쳐지는 영화. 또 다른 관록의 명배우 닉 놀테가 친구로 나온다. 빌 브라이슨의 책을 바탕으로 한 ‘Walk in the Woods’에도 둘이 나오는데, 트레일러를 돌려 보면서 영화는 어떨까 퍽이나 궁금해 했다. 쉬야 라보프의 연기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수전 서랜든, 크리스 쿠퍼, 테렌스 하워드, 스탠리 투치, 리처드 젠킨스 등 명불허전의 명배우들이 워낙 많이 나와서 더 좋았다. 줄리 크리스티의 얼굴을 아주 아주 오랜만에 본 것도 한 소득.
  • All is lost (2013) - 아직 안 봤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 주말에 볼 생각.
  • Three Days of Condor (1975) - 어렸을 적 흑백 TV로 본 영화. 주말의 명화였던가 명화극장이었던가? 몇십년 만에 넷플릭스를 통해 제대로 된 컬러와 화질로 봤다. 역시, 여전히, 재미있었다. 레드포드는, 남자가 봐도 한숨이 나올 지경으로 잘 생겼다. 저런 매력남이 납치하는데, 더더군다나 납치해서도 신사도를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도대체 어떤 여자인들 안 넘어갈까 싶었다. 물론 상대역인 페이 더너웨이도 만만찮은 마스크지만… 이 영화의 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 우스워서 - 것은 이제는 고인이 된 명비평가 로저 이버트의 것이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던 중이다.

    He kidnaps her in order to use her apartment as a hideout, but something about him (perhaps his uncanny resemblance to Robert Redford) convinces her that he's not paranoid -- that, indeed, there really are people trying to kill him

    그(레드포드)는 그녀(더너웨이)의 아파트를 은신처로 삼기 위해 그녀를 납치하는데, 그의 무엇인가가 (아마 그가 미남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와 너무 닮아서?) 그녀로 하여금 그가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점을 확신시킨다.


이완 맥그리거

  • Jack the Giant Slayer (2013)
  • The Impossible (2012) - 실제 벌어졌던 대규모 쓰나미 재난으로부터 생존한 이들의 이야기. 
  • Salmon Fishing in Yemen (2011) -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마음에 든, 아주 사랑스러운 영화.
  • The Ghost Writer (2010) -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영화들 중 하나. 피어스 브로스넌도 나온다.
  • Beginners (2010)


피어스 브로스넌

  • Survivor (2015) - 드물게 악역인데,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늘 솔로 영웅 역을 도맡는 밀라 요보비치가 주인공인데, 시나리오의 허술함이 영화의 완성도를 망쳤다.
  • The November Man (2014)
  • The Ghost Writer (2010) 
  • Seraphim Falls (2006) - 요즘은 참 보기 드문 서부영화다. 리암 니슨도 나온다. ‘Quirky’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다소 이단적인 서부극. 좋다.


케빈 코스트너

  • McFarland, USA (2015) 
  • Draft Day (2014)
  • 3 Days to Kill (2014)


브래드 피트

  • Fury (2014) 
  • Money Ball (2011)
  • World War Z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