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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문화예술훈장

맨 아래 박아놓은 유튜브 비디오를 본 것은 지난 주다. 다른 채널로 우연히, 유명 소설가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가 미국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 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본 것인데, 그 뒤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블로그로 포스팅 한다. 그 자리에서 오바마가 했다는 말이 인용문으로 나왔는데 절로 웃음이 피식 나오는 말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위대한 시인 중 한 분인 에밀리 디킨슨은 이런 말을 했죠. "진실은 너무나 드문 것이어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한없이 즐겁다." 진실은 너무나 드물어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즐겁다 ... 이건 특히 워싱턴 정가에 딱 들어맞는 말이죠. (웃음.) 우리가 오늘 치하하는 여러분, 국민문화예술훈장의 수혜자 여러분을 여기에 모신 것은 여러분이 드문 진실을, 때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관한 진실을 우리와 나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겪은 공통의 체험에 관한 드문 진실을 여러분이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바마의 연설은 거의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힘차고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이 행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이벤트 중 하나라고 말할 때도 진심이 느껴졌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학구적이고 책을 좋아하고 지적인 토론을 즐기는 오바마 아닌가. 


국민문화예술훈장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문화예술인이 한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에 속한다. 하지만 훈장 수여식이라는 게 무슨 재미가 있으랴... 대표라는 이 - 이 경우는 대통령 - 가 판에 박힌 축사 한 번 하고, 수혜자들에게 메달 하나씩 나눠 주면 그게 끝 아닌가. 그런데 이 행사는 의외로 재미 있었다 (요즘 표현을 따른다면 '재미졌다'). 아니, 재미라기보다는 숙연하고 진지한 분위기에, 자잘한 감동까지 안겨주었다. 내 경우는 뜻하지 않은 '공부'까지 했다. 특히 아래 사진 속 인물에 대한, 얼마 안 되지만 퍽 소중한 공부다. 



이 분의 이름이 나오는데 '트바이어스 울프' (Tobias Wolff)란다. 뭐라고? 토비아스 울프가 아니고? 한국에선 다 토비아스 울프라는데? 한국의 돼먹지 못한 외래어/외국어 표기 규정 때문에 또 한 번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현지 발음을 존중한다며? 그래서 이미 라디오와 비슷하게 완전히 굳어져 버린 모택동마저 마우쩌둥 어쩌고 바꿔서 사람들 헷갈리게 하더니, 정작 이런 이름은 애먼 바이아그라를 비아그라로 둔갑시키듯 토바이어스 울프를 토비아스 울프로, 우리 식으로 부른다? 그러려면 정말 우리 식을 고집하든가... 

각설하고, 내가 배웠다는 건 한국의 외국어/외래어 표기 규정이 엉터리라는 사실은 아니다. 이 존경 받는 작가가 했다는, 실로 깊은 울림을 주는 몇 마디 말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의 훈장 소식을 축하하는 스탠포드 대학의 문학 관련 블로그인 '책의 안식처' (The Book Haven)에서 얻어 들은 울프의 몇 가지 어록이다. 블로그에는 더 많이 나와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위 링크를 따라가 보실 것 (참고로, 저 블로그의 주인장 이름이 신시아 헤이븐이다. 그러니 책의 안식처 Haven은 중의적이다. 멋지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말 중에서 특히 내게 개안(開眼)의 충격을 준 말은 “Time, which is your enemy in almost everything in this life, is your friend in writing”이라는 지적이었다. 시간은, 이생의 거의 모든 것에서 당신의 적이지만, 글쓰기에서만은 당신의 친구이다!


이날 훈장을 받은 이들 중에는, 문화 예술에 별로 밝지 못한 내게도 낯익은 인물들이 꽤 보였다. 명배우 겸 영화 제작자인 샐리 필드, 음악가 메레디스 몽크, 명문장가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알려진 애니 딜라드, 그리고 앞에 잠깐 언급한 줌파 라히리, 특히 내게 반가웠던 인물은 '우리 시대 가장 인기 있는 다작 소설가이며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빼어난 이야기꾼 솜씨로 수십 년에 걸쳐 호러, 서스펜스, SF, 환타지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통해 전세계 독자를 공포에 빠뜨리는 동시에 큰 즐거움을 선사'한 인물로 소개된 스티븐 킹이었다. 아무렴!   




미국 사회가 미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비극적 총격 사건들이나, 도날드 트럼프 같은 쓰레기 기업가가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르는 꼴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국민문화예술훈장을 수여하는 이러한 장면을 접하게 되면, 미국 사회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결코 아니라는, 진부하지만 종종 잊게 되는 사실을 상기 받게 된다. 이런 대통령을 둔 나라, 이처럼 다종다양한 - 문화의 분야뿐 아니라 인종과 출신에서도 다종다양한 - 문화예술인들이 마음껏 '끼'를 발산하는 나라...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한 송강호의 어투로) "아름답다,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