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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읽는 것들

블로그를 일기처럼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자주 업데이트하고 싶은데, 생각만큼 쉽지 않다. 생각은 자꾸 쪼개지고, 독서는 자꾸 짧아지고 얕아지면서 넓게 퍼지다 보니, 어느 하나를 진중하게 '주제'로 붙들고 글을 쓰기도 어렵다. 그런 분절적 행태의 원인을 몇 가지 꼽자면 분주한 일상과 페이스북, 그리고 게으름이다. 지난 며칠 간의 행적을 - '지적' 행적이라고 감히 불러도 될까? - 되짚어 봤다.



요즘 가장 뜨거운 뉴스가 되고 있는 대규모 난민 사태에 대해 유명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이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글을 퍽 흥미롭게 읽었다 (글은 여기). 난민 사태의 역사적 배경뿐 아니라 유럽 선진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짚었다.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가 높은 철학자라고 들었는데, 그의 평이한 문체와 직설적인 논지 전개 방식을 보니 왜 그런지 알겠다. 그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아래 옮긴다.




특히 소설의 경우, 한 권에 오롯이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권을 동시 다발적으로 읽는 편이다. 요즘 읽는 책은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 'Station Eleven', 'The Martian', 'Ben Franklin's Website' 'Nothing to Hide' 같은 것들이다 (마지막 두 권은 프라이버시 관련 논픽션이다). 케이트 앳킨슨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데,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것들 중 상대적으로 초기작인 이 책부터 시작했다. '휴먼 크로케'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시간 여행이 연루된 일종의 환타지성 소설인 듯한데 일부러 상세한 줄거리는 미리 보지 않으려 한다. 혹시 이 책이 근작 'Life after Life'와 'A God in Ruins'의 단초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살짝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소설을 열자마자 앳킨슨의 이 인용문이 나왔고, 읽으면서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도도하게 이어지고 또 이어질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만났다. 마음 한 구석이 괜히 먹먹해졌다. 리 헌트라는 이가 쓴 '1814년의 봄에 부치는 시'다.




<세계일보>에 실린 꽤 길고 상세한 기사. 한국과 달리 캐나다 연방 정부는 2011년 공식적으로 의무 퇴직 연령 조항을 폐지했다. 뉴브런즈윅 주를 제외한 캐나다 전역에서 몇 살에 은퇴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은 더 이상 없다. 물론 직군 상의 예외는 있다. 하지만 특정한 나이에 은퇴해야 한다는 조항 자체가 인권 침해라는 견해가 수용되어 캐나다인권법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되었다. 한국의 의무 퇴직 연령이, 다른 어느 나라의 경우보다 더 위선적이고 사악해 보이는 것은, 지금 한국 사회를 정치적으로 말아먹고 있는 퇴물 정치인들의 가공할 연령대 때문이다. 노인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그러면 그 따위로 사회를 망쳐먹고 젊은 세대의 꿈을 죽여 '헬조선'으로 만드는 작태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말인가? 70대, 80대에도 분명히 3,40대 못지 않은 지력과 기력과 열정을 유지할 수는 있다.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실리콘 밸리의 거품, 제2의 닷컴 거품이 멀지 않았다. <배너티 페어>에 기고한 닉 빌튼의 글을 읽고난 소감이다. 그나저나, 이 친구, 정말 재미있게 잘 쓴다. 하긴 빌튼의 단행본을 읽으면서 뛰어난 취재력과 글 솜씨를 익히 알고 있던 터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