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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성준이 생일, 그리고 말러

분주하게 보내면 심지어 주말조차 제법 길다고 느껴진다. 이번 주말이 그렇다. 다른 주말에 견주어 일이 많았다. 금요일 (6월12일)은 성준이의 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실상은 birth'day'가 아니라 birth'week', 심지어 birth'month'처럼 여겨진 6월의 둘째 주였고, (5월 중순부터 지속된) 한 달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흐름에서 가속도를 느낀다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 반대의 인상을 같는 것 같다. 감속도, 혹은 아예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한 답답함. 왜 이렇게 시간은 더디게 흐를까?



조촐하게 촛불 끄고 케이크 자르는 '예식'을... 성준이 옆에 놓인 레고 '아이언맨'은 생일선물. '헐크 버스터 스매쉬'를 사달라고 노래를 부른 게 벌써 여러 달 전이었다. 나는 자주 그 이름을 헷갈려 스매쉬를 크래쉬라고 했다가 그 때마다 성준이의 교정을 받았고 ('No, not crash, smash!)...



토요일에는, 정말 어렵사리, 아내와 함께 음악회에 갔다. 밴쿠버 심포니의 2014/15 시즌 피날레로 시벨리우스의 '바드', 라벨의 치간느, 그리고 말러 5번 (물론 이게 메인 메뉴)을 연주했다. 아내는 무려 3년여 만에 처음 음악회를 본다며 자못 흥분했다. 평소에 동준이의 수영과 과외 활동을 도와주는 보조 교사에게 동준이와 성준이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시간이 맞아서 다행히 성사되었다. 



밴쿠버 심포니의 전용 연주 공간인 오피엄 씨어터 (Orpheum Theatre)에서. 다양한 예술 행사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오피엄 씨어터는 1927년에 지어진 퍽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2009년에 대규모 수리를 거쳤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헤리티지 사이트'로 지정된 건물이다. 


연주회는 예정된 시간보다 10분쯤 늦은 8시10분께 시작되었다. 소품인 시벨리우스의 바드가 퍽 아름답고 서정적이었고, LA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열여덟 중국계 여학생이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라벨의 치간느는 퍽 현대적인 집시풍으로 자유 분방하게 들렸다. 바이올린의 기교를 돋보이게 하는 곡이라는 생각인데, 특별히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오늘의 메인 레퍼토리는 말러 5번.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주였다는 인상이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첫째는 홀의 음향. 오피엄 씨어터의 음향이 퍽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말러는 아니었다. 특히 총주가 나올 때 홀은 그 요란하고 폭발적인 소리를 감당하지 못해 쩔쩔 맸다. 비유한다면 감당할 수 있는 음량을 넘겨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스피커 같았다고 할까? 총주의 스펙터클이 제대로 울리고 퍼지고 흡수되지 못한 채, 너무 좁은 공간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듯한 형국이었다.


또 하나는 고르지 못한 관의 연주력. 대체로 무난했지만 트럼펫과 트럼본 쪽에 비해 프렌치 혼의 소리가 다소 불안했다. 때로 음량 조절을 제대로 못해 다른 악기들의 소리와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게 튀었다. 두어 대목에서 '삑사리'도 났지만 전체 연주를 그르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3악장의 혼 독주는 우려와 달리 퍽 무난하게 잘 연주했다. 거의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그렇듯이 현은 퍽 안정적인 소리를 들려주었다. 특히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군의 소리가 퍽 매력적이었다.

말러의 곡들이 오케스트라에 엄청난 노동량을 안겨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연주에서도 그런 점은 또렷이 부각돼서, 마지막 5악장 중반부에서 오케스트라는 연료가 떨어진 승용차처럼 표나게 힘이 떨어지는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오케스트라의 스태미너가 정말 중요하구나,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VSO의 말러 5번 연주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2악장. 소리의 균질성, 균형 감각, 악기들 간의 어울림 등에서 가장 무난했다는 느낌이다. 5번의 하이라이트처럼 여겨지는 4악장 '아다지에토'는 그저 무난했다는 생각. 워낙 널리 알려지고 자주 연주되는 음악은, 웬만큼 잘 연주하지 않고는 본전 찾기도 어렵다는 상식을 잘 보여준 대목. 5악장은 약간 위태위태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힘이 빠져 헤매다가, 피날레에서 겨우 명예 회복에 성공한 경우.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브라보!'라고 외치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렸지만, 내 귀에는 연주를 정말 잘해서라기보다는 드디어 끝났구나, 라는 안도감이나, 고생했다라며 어깨를 도닥여 주고 싶은 감정의 발로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위 사진의 지휘자는 VSO의 상임인 브램웰 토비).


집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10시30분보다 20분쯤 더 늦은 11시다. 심신이 피곤했고, 늦은 시각까지 동준이와 성준이를 봐준 보조 교사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연주회 하나 함께 보기가 이렇게 어렵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