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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고요 - 아바도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토요일 밤, 지난해 안타깝게 타계한 거장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1933-2014)에 관한 타규멘터리 'The silence that follows the music' (1996)를 베를린 필하모닉의 온라인 서비스인 Digital Concert Hall로 다시 봤다. 위 제목은 문맥상 '공연 직후의 고요'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텐데, 2003년에 나온 또 다른 아바도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Hearing the silence' (고요를 듣다)인 것을 보면 악기나 목소리로 내는 '소리'보다, 그것이 끝난 뒤의 고요, 정적에 대해 아바도는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


실제로 아바도 자신도, 연주를 마친 직후, 아직 청중이 '브라보!'라고 외치거나 박수를 치기 직전의 그 정적, 그 고요를, 한없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의 마지막 절창 중 하나로 꼽힐 말러의 교향곡 9번 연주는, 정적에 대한 아바도의 사랑, 혹은 염원, 혹은 명상을, 표나게 보여준다. 2010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가진 9번 연주에서, 아바도는 연주가 끝난 뒤에도 지휘봉을 가슴에 안고 아주 오랫동안 서 있다. 아니, 시나브로 잦아드는 마지막 악장의 가냘픈 소리가 어느 시점에서 사라지고 정적이 시작되었는지, 어디가 끝이었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주자들은 악기 위에 활을 올려놓은 그 자세로 마치 굳어버린 소금기둥처럼 정지해 있고, 아바도는 숨을 헐떡이며, 지휘봉을 가슴에 안은 채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청중도 자발없이 '브라보!'라고 외치거나 박수를 보내는 대신 침묵을 지키며 끈기 있게 기다린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멀지 않은 죽음을 예감하는 것일까? 말러가 그린, 명상한, 죽음의 세계 속에 침잠해 있는 것일까? 



느낌으로는 '영원'에 가까울 만큼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아바도와 연주자들은 침묵을, 고요를, 정적을, 연주한다. 전파한다. 아마 실제 시간은 채 5분이 안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주 직후의 정적은, 한없이 깊고 길었다. 그래서 더 감동이었다.


1996년의 다큐멘터리 말미에서, 아바도는 정적의 아름다움, 고요가 주는 '삶에 대한 감각' (sense of life), '삶의 의미' (meaning of life)에 대해 이야기한다. 북적대고, 언제나 끝없이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문화적으로 더없이 풍요로운 베를린의 삶에 감탄하면서도, 그러나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감각은 그런 대도시의 번잡함이 아닌, 산 속의, 산 위의 절대적 고요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아바도는 맑고 선한 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하도 고요해서, 눈이 내릴 때, 그 눈이 땅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세계에서, 삶의 진정한 감각과 의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다시 아바도의 말러를 듣는다. 그는 저 세상에서 고요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을까? 새삼 그의 음악 유산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Rest in peace, Maestro Abbado! 



Claudio Abbado - The silence that follows the... by obiwan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