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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의 말년 지휘 모습.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의 도입부, '오 운명이여!'에서 캡처한 이미지.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 (Rafael Frühbeck de Burgos, 1933-2014). 


작년 6월에 타계했다. 너무 늦게 안 셈이다. 음반을 퍽이나 열심히 모으던 90년대 어느 때쯤, EMI 음반에서 그 이름을 만났지만 별다른 인상은 받지 못했다. 카라얀, 번스타인, 아바도, 하이팅크, 래틀 같은 더 유명하고 상업적으로도 더 널리 홍보된 지휘자들에 가린 탓도 있을 것이다. 


며칠전, 우연히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실황을 보고 싶어 유튜브를 검색하다 그를 다시 만났다. 아니, 이름만 들었다고 안다고 할 수는 없을테니, 처음 만났다고 해도 되겠다.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와 코펜하겐 로열 채플 합창단의 연주.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라고? 별로 큰 기대 없이, 그저 화면이 'HD'라는 데 끌려 틀었다 (오케스트라의 공식 홈페이지는 여기).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명연! 오르프의 악보를 얼마나 충실하게 옮긴 연주인지는 모르지만 몇 가지는 분명했다. 생동감, 약동감이 넘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색감이 짙다고 할까? 퍽이나 강렬한 맛을 느끼게 했다. 화려한 원색, 그러면서도 개별 빛깔 하나하나가 뚜렷이 분별되며 빛나는 그림. 지휘자가 퍽이나 나이 들어 보이는데... 아래 설명을 보니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 아, 이 사람이구나!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유튜브 검색창에 넣어 보았다. 


Bonanza! 시쳇말로 헐, 대박! 음질과 화질 모두 수준급인 영상이 푸짐하게 펼쳐졌다.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파인 교향곡, 베르디의 레퀴엠... 그 중에서 특히 끌렸던 것은 데 부르고스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했을 것 같은 알베니즈의 에스파냐 모음곡, 그리고 페페 로메로와 협연한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이었다. 


아랑후에즈 협주곡 연주 직후, 페페 로메로가 대견해 못 견디겠다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는 데 부르고스 할아버지. 로메로의 기타는 역시 명불허전.


신기했다. 지휘자는 연로해서 의자에 앉아 있고, 따라서 역동적이거나 패기 넘친 지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가 내는 소리는 열정과 힘에 넘쳐 있다. 각 음표들이 생기를 띠고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리가 뚜렷하고 선명하다. 빛과 그림자의 대조가 그보다 더 선명하기가 어렵겠다. 어떻게 이렇게 선연하게, 개성이 또렷하게 부각되는 소리를 만들 수 있을까? 


음향 좋은 홀에서, 첨단 음향 기기를 전문적으로 용의주도하게 배치해 녹음했을 음반들에서도, 종종 마치 얇은 막이 그 위를 코팅한 것처럼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 조금만 덜 또렷하고 선명했더라면, 조금만 더 거칠거칠한 맛, 활어의 약동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며 아쉬워하곤 한다.사실은 'HD' 영상으로 보는 실황 공연에서조차 그런 답답함을 맛볼 때가 없지 않다.


데 부르고스가 지휘하는 덴마크 라디오 심포니의 소리는 그런 아쉬움을 주지 않는다. 몇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시원하다. 심포니의 연주와 내 귀 사이에 종종 쳐진 듯하던 얇은 막 따위는 없다. 양감과 음영 뚜렷한 유채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서늘한 그늘에 앉아 구름 한 점 없이 햇빛 찬란한 한여름의 열기를 바라보는 느낌, 온도와 습도를 잘 조절해 각양각색의 꽃과 식물이 제 빛깔을 유감없이 또렷한 원색으로 표출되도록 관리된 식물원의 한 가운데 선 느낌...


라파엘 프뤼벡 데 부르고스. 


너무 늦게 만났다. 아쉽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의 연주들이 남아 있는 한, 아주 늦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고 듣게 될 연주들. 


이 블로그를 찾으시는 분들도 유튜브를 통해, 이 거장의 명연들을 감상하는 행복을 맛보시기 바란다. 


거장의 명복을 빈다.